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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에서 “스타트업 PM”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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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성 일시
2026/03/04 02:06
최종 편집 일시
2026/03/04 02:06
태그
딜라이트룸
파일과 미디어
|| 가장 높은 자리에서 내려와, 가장 작은 팀에서 다시 배우는 스타트업 적응기 커리어 정점을 찍다 돌이켜보면 꽤 화려한 시절이었다. 직장인으로서 오를 수 있는 끝까지 올라봤으니 말이다. 우연한 기회로 초기 스타트업에 합류하게 되어 사업과 제품을 동시에 만들어가던 시기, 매일이 문제 해결의 연속이었고 회사는 눈에 띄게 성장했다. 성장 과정에서 정해진 역할보다 “지금 당장 필요한 일”이 우선이었다. 그 덕분에 회사의 거의 모든 영역에 자연스럽게 관여하게 됐다. 결국 대기업에 편입됐고, 회사가 커지면서 조직은 정비되었다. 외부에서는 우리를 ‘성공한 스타트업’이라 불렀다. 그 과정에서 나는 C-Level, 소위 말하는 임원이 됐고 집무실도 생겼다. 개인 명패가 붙은 공간에서 하루를 시작한다는 사실이, 그 공간의 크기가 내 위치를 직관적으로 설명해주고 있었다. 결국, 신사업 법인을 맡게 되며 대표라는 타이틀도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위로 올라가는 흐름이 단 한번도 멈춘적 없었고, 멈출 이유도 없어 보였다. 정말이지 단 한순간도 자신 없었던 적이 없었다. 겁없고 겸손을 몰랐던 그 때, 이렇게 눈 떠보니 대표가 되어 있었다. 다 가졌는데 하나도 가진게 없다 가질 수 있는 것은 다 가졌다. 본사업 법인의 부사장, 신사업 법인의 대표를 겸하며 두 회사를 오갔다. 그 과정에서 국내 통신 최초의 ‘비대면 본인인증 통신 가입’ 인프라를 구축했고, 범용 공인인증서 폐지 흐름과 사설 인증 시장 형성에 기여했다. 더 큰 의사결정을 하고 더 많은 자원을 움직일 수 있는 자리였다. 주변의 부러워하는 시선조차도 자연스러워졌다. 멀게만 느껴졌던 대기업 사장단과 임원진과 같은 테이블에 앉는 일이 더 이상 특별하지 않게 됐다. 겉으로 보기엔 부족한 것이 없어 보였다. 적어도 그때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하루를 채우는 일의 성격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하기보다는, 이해관계자들을 설득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쓰고 있었고, 가치 있는 제품을 고민하기보다 그 가능성을 정당화하는 자료를 만드는 일이 더 중요해졌다. 가능성보다 명분이 앞섰고, 실행보다 설명이 필요했다. 모든 선택은 주주 관점에서 납득 가능해야 했고, 빠른 실험 대신 합의와 검증이 속도를 대신했다. 이 방식이 잘못된 건 아니었지만, 내가 가장 잘하던 방식은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를 보고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제품을 만들며 느끼던 감각은 희미해졌고, 내가 잘하는 일과 실제로 하고 있는 일 사이의 간극은 생각보다 빠르게 벌어지고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이게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이 맞을까?” 모든 걸 내려놓다 결국, 그만두는 쪽을 선택했다. 의사결정은 점점 느려졌고, 신사업의 추진 속도도 자연스럽게 더뎌졌다. 캘린더는 빼곡했지만, 실행은 비어 있었다. 여러 가능성을 검토하는 과정이 길어질수록, 시장과의 간극은 눈에 띄게 벌어지고 있었다. 더 이상 상황을 통제할 수 없는 자리에서,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일하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스스로에게 더 이상 답을 줄 수 없었다. 오랜 고민 없이 결정을 내렸고, 그 결정은 단호했다. 이미 답은 어느 순간부터 정해져 있었고, 이제 그 답을 실행에 옮겼을 뿐이었다.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보기로 했다. 관리하고 설명하는 역할이 아니라, 직접 문제를 정의하고 제품을 만드는 일부터 다시 시작해보고 싶었다. 규모나 직함보다, 일의 밀도와 방향을 선택하고 싶었다. 그렇게 모든 걸 내려놓고 ‘딜라이트룸’으로 합류했다. 작은팀, 빠른속도, 높은밀도 딜라이트룸은 작다. 조직은 작지만 체계적이고, 각자의 역할과 책임은 명확하다. 모두 순한 얼굴로 일하지만,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만큼은 꽤 날카롭다. 기본을 지키는 데 집요하고, 그 기본을 높은 기준으로 유지하려는 긴장감이 전체에 흐른다. 허투루 쓰는 시간이 없다. 회의 하나, 결정 하나가 곧바로 실행으로 이어진다. 빠르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기민하고, 유휴 인력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